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민당의 2차 북벌 (문단 편집) ==== [[장왕합작]] ==== 광저우에서 왕징웨이는 [[리지선]]과 회합을 가지고 중앙집행위원회 회복, 광저우 국민정부의 신설, 당내 분규 해결을 위해 4중전회 소집을 주장했다. 왕징웨이, 리지선은 연명으로 4중전회를 광저우에서 개최하겠으니 각 위원들의 출석을 요구했다. 이에 리쭝런, 바이충시는 난징에서의 개최를 주장하며 반발했다. 이는 각자의 기반에서 중전회를 개최하여 주도권을 잡기 위한 싸움이었다. 결국 11월 1일 축석위원의 부족으로 난징에서의 4중전회는 개최되지 못했고 [[탄옌카이]]가 광동의 중앙위원들에게 통전하여 출석을 요청했고 여기에 친장 5원로도 동참했다. 이들의 의도는 복잡했는데 왕징웨이와의 합작을 위해 4중전회 개최는 동의하였으나 광동파의 주도권 장악을 막기 위해 난징에서의 개최는 고수하려 한 것이었다. 여기에 후한민마저도 중전회 소집에 찬성함으로 특위에 대한 타격은 더욱 커졌다. 이에 고무된 왕징웨이는 특위의 존재 자체가 4중전회 소집에 큰 장애요인이라면서 특위를 취소하거나 최소한 직권을 정지할 것을 요구했고 그러한다면 소집장소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에 난징 측은 특위의 취소나 직권 정지는 중전회에서 논의할 문제라면서 거절했으나 중전회 소집을 상하이에서 하는 것을 제안하는 등 중전회 소집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한편 광동파는 난징을 무시하고 광저우에 중앙당부를 설치한 것인지, 아님 예비회의 참석 후 진로를 결정한 것인지 이틀 동안 논쟁에 들어갔는데 11월 10일 마침내 귀국한 장제스가 당의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모임을 갖자는 전보를 보내왔다. 장제스 역시 중전회 소집에 동의한 것이었다. 이에 참석자들은 광저우를 고집할 것 없이 상하이에서 장제스와 회동하여 회의장소를 결정하자고 했고 이를 위해 왕징웨이와 리지선을 상하이로 파견했다. 그리고 특위 취소, 중앙집행위원회 회복, 4중전회 소집을 협상 조건으로 내걸었다. 어느 하나라도 이뤄지면 특위의 무력화는 확실한 것이었다. 장제스는 귀국 전부터 왕징웨이와 합작이 필수적이라 판단, [[쑹쯔원]]을 광저우로 보내 왕징웨이와 합작의 절차와 방법을 상의하기 시작했고 스스로도 왕징웨이에게 편지를 보내 당국의 중임을 맡아줄 것을 부탁했다. 왕징웨이 스스로도 쑹씨 가문 및 쑹씨 가문과 연결된 쿵씨 가문과 연계가 있었으며 특위라는 공동의 적을 상대로 하게 되어 장제스와의 합작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장제스는 광서파가 장악한 난징보다는 광동파의 광저우가 낫다는 입장을 피력하고 있었는데 국내의 분위기가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것을 인식, 상하이를 통해 재기하기로 결정하고 왕징웨이와 본격적인 접촉에 들어갔다. 왕징웨이도 동조하면서 2차 [[장왕합작]]이 형성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